사실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 바로 앞에 있는 항우연(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연구했던 분야가 시스템 제어 이론이었는데 졸업을 할 때쯤,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박사후연구원을 신청해서 1년 동안 거주 지원을 확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항우연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교수님께서 지원해보라는 권유를 해주신 거에요. 그래서 지원하였는데 덜컥 됐네요.
그래도 저는 독일의 연구소를 가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잘 생각을 해보라고 말씀해 주시는 거에요. 지금 당장 제일 좋은 것은 독일 연구소에 가서 1년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일 텐데,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항우연이 새롭게 보이더군요. 마침 다목적 실용 위성1호를 막 발사하고 매스컴에도 보도되는 상황이었어요.
결국 결정을 못하고 다시 지도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최선의 선택을 하지 말고, 옳은 선택을 하라.” 옳은 선택을 하면, 힘들어도 그것을 끌고 나가는 힘이 이 있다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으면, 10년 뒤 모습을 상상해보라고 하시더군요.
항우연에 와서 처음 몇 년간은 힘든 시간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서 진로에 대해 가이드를 해 주셨지만, 크고 나니 가이드 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입사 후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학위는 땄지만, 항우연에서의 업무는 생소한 부분도 많았고요. 그래서 우선, 국문으로 된 물리학 책을 사서 다시 몇 개월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때 든 생각이, 처음부터 차곡차곡 원하는 분야의 지식을 쌓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다른 길을 걸어가며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쌓은 뒤 원하는 일을 하는 것도 나름 좋은 점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우연 업무가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다른 지식과 경험을 기초로 계속 하다 보니 나중에는 재미있더라고요. 10년 뒤를 생각했을 때 재미있는 분야가 지겨워질 수도 있는 것이고, 지금 부족하고 잘 모르는 것을 계속 지속하다 보면 나중에 능숙해질 수도 있는 것이니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원래 책도 잘 안 읽었는데,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들어가며 경쟁이 심하고 힘들어지니까 뭔가 남기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평범한 일기가 아니라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같은 스타일이었죠. 반성문이 아닌 희망적이고 새로운, 하고 싶은 내용을 썼습니다. 그리고 쓴 일기를 자주 보고, 심지어 제 아이들에게도 동화책 읽듯 읽어주곤 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예전에도 고민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똑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구나, 별거 아니구나' 혹은 '예전에는 이런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좀 바뀌었네. 다르게 생각해보자'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전 가장 어려운 순간 일기를 쓰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동시에 책도 많이 읽으면 더더욱 좋고요
독일의 연구소를 포기하고 항우연에 들어간 처음에는 좀 불안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집에서 짜장면만 좋아하면 행복하고요, 짬뽕만 좋아해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둘 다 먹고 싶으면 불행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선택을 하면 행복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더 불안해져요.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 거죠. 이때 '합리화'가 필요합니다.
이솝우화를 보면 여우가 걸어가다가 포도나무를 보고 따려고 노력하다가 성공하지 못하자 스스로 '저 포도는 덜 익었을 거야' 라고 합리화를 합니다. 그리고 이 우화에서는 노력해서 되지 않으니 남 탓을 한다는 교훈을 전달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여우가 합리화하지 않았다면 계속 미련이 남아 후회했을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다른 길을 찾거나 그 길을 쭉 참고 가는 것이 과거의 처신을 후회하고 주저앉는 것보다 나을 수 있으며, 저는 이 때 '합리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인생을 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목표는 눈 앞에서 머무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럼 졸업을 하고 나서는요? 돈을 많이 버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는요? 사장이 되어 해외 다니는것을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 후를 계속 묻다 보면 대답하기 어려워집니다. 보통 무엇인가 되기를 원하지, 목표를 달성한 후 그 위치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40대 초반에 소속 조직과 주업무를 바꿀 기회가 왔고, 과감히 지원했습니다. 바로 지금 속한 사업단이에요. 30대 때는 오더가 들어오면 거기에 맞추어 만들기만 했는데, 그 생활을 10년, 20년 계속하면 지루할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새로운 길을 가다 보니 세상과 소통을 하기 시작했어요. 40대가 되니 강연이나 인터뷰 같은 외부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30,40대에 누적된 대내외 활동을 기반으로 50대에는 책을 낸다거나, 강의 등으로 공헌하며 다른 이들에게 제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는 활동을 해보고 싶어요. 많이 채우려면 많이 비워야 한다는 말처럼, 제가 그 동안 축적한 지식이나 경험 등을 후배 친구들에게 물려주고, 제 스스로는 더욱 성장하는 것이죠.
항공 우주라고 해서 항공 우주만 고집하면 발전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고전 인문학에 진리가 있기 때문에, 고전학, 인문학 책을 추천하고요, 그 외에 예술책, 미술작품 등을 보며 상상력을 더하면 생활에서 원하는 것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기가 좋습니다. 저도 40대 후반인데, 실용 음악학원에서 보컬 레슨도 받고 있고, 기타도 배우고, 권투도 배우고 있습니다. 박물관도 가고 고전학 책도 많이 보고 있고요. 앞으로도 많은 인문학, 예술을 접하며, 제 생활의 일부로 만들어서 제가 갖고 있는 기술을 세상에 내어놓는데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