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당시에 금속공학 전공자는 박사과정을 마치면 현대나 포스코 등의 대기업으로 취업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그건 저의 인생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는 서울대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 때는 카이스트를 나오면 서울대 교수를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죠.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갔는데, 저와 잘 맞지 않아서 석사를 마친 후 다른 대학을 갔습니다. 다행히 지도교수님을 잘 만나 운이 좋게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전자현미경을 전공했는데, 제가 1세대였습니다.
이후 오스람 실바니아(OSRAM SYLVANIA)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투과전자현미경, 분석전자현미경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한국에서 사용할 전공서도 집필했습니다. 그렇게 3년 정도는 순탄하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갑자기 불황이 닥쳤습니다. 회사에서는 현미경을 갖고 대학으로 가서 연구할 것을 권했습니다. 모두 네 곳의 대학에서 제의가 왔었고 주립 대학 부교수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제주 나노 포럼에서 기조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포럼이 제가 한국에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죠.포럼이 끝난 후, 포럼 관계자에게 인제대학교에서 나노공학과를 만들어 키우려고 하는데 와서 강의를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젊은 인재들이 나노공학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바로 초청 강의에 응했습니다. 그렇게 한국에 49살에 들어왔고, 인제대학교 총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인제대학교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세계화였습니다.8년의 임기 보장을 받고 대학혁신을 추진했으며, 대통령자문위원도 했습니다. 한국 학생들의 눈을 조금 더 높여주고 싶었습니다. 산학협력단, 기술이전, SBI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한번은 효성 그룹에 초청 강연을 가게 되었는데 강연장 맨 뒷자리에서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제 강의를 경청하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분이 당시 회장님이셨죠. 그 분께 기업의 새로운 신성장 사업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CTO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탄소 섬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효성에서 그것을 해결 하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재직하는 동안 5명이던 직원은 86명이 되었고, 4년 만에 연구성과를 달성하였습니다.
그러다 한국녹색기술센터(GTCK) 초대 소장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에서 쌓았던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양한 녹색성장 정책과 기술을 맡아 업무를 수행했고, 외교부 자문위원도 하면서 덕분에 UN까지 진출하였습니다. 2년 동안 직접 관계자를 찾아가서 물어보는 등 발품을 팔아가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리더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운이 좋게 교수, 총장, CEO 등 줄곧 리더의 역할을 맡아왔는데, 저는 리더십 관련 내용을 학습을 통해 배웠습니다. 미국에서 출퇴근 시 자가용을 타고 다녔는데, 그 때 오디오북으로 MBA Summary를 들으며, 경영, 인사, 리더십, 기술경영 등에 대한 공부를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회식에 자주 참석하여 국내문화에 맞춘 리더십을 발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경력을 개발함에 있어 작은 의견을 드리자면, 첫째, 원하는 목표와 연관된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는 그 만큼 연구자 네트워크가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혼자만의 힘으로는 노벨상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둘째, 젊은 과학기술인들이 스스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은 연구환경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외국과 비교하여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부족한 점을 인지할 때 성장의 기회가 보이기도 하고요.요즘과 같은 4차 산업혁명 시대야 말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럴 때 위기의식이 매우 필요하고 리더들이 앞서서 이끌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