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노하우, 직장생활 등 일상 속 경력개발 이야기를 공유해보세요.
□ 낯선 세계로의 초대, '트라우마'
2020년 5월 말, ‘Accept’라는 단어가 선사했던 짜릿한 기쁨을 아직 기억한다.
3회차 글에서 이야기했던 나의 첫 단독 연구 논문, 「뉴스 빅데이터를 활용한 코로나19 언론보도 분석」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 작은 성공은 ‘나도 연구자로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구나’라는 소중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거대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줄 열쇠가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2021년 4월의 어느 날,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던 내게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김태종 박사님. 저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OOO입니다.”
국내 보건·복지 분야 최고의 국책연구기관에서 걸려온 전화에 잠시 숨을 골랐다.
박사님은 나의 코로나19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다며, 조심스럽게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
연구 주제는 「한국인의 트라우마와 회복력 증진 전략」. 그중에서도 뉴스 빅데이터를 활용해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트라우마 이슈’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트라우마’. 솔직히 말해, 나는 그 단어 앞에서 작아졌다.
언론학과 교육학을 공부한 내게 트라우마는 낯선 세계의 언어였다.
심리학, 정신의학, 사회복지학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그 무거운 주제를 내가 감히 다룰 수 있을까? 연구보고서 발간사의 한 구절처럼,
이 연구는 높은 자살사망률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위협받는 국민의 정신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을 논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었다. 내 분석이 누군가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두려움과 함께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아니, 반드시 도전해야만 하는 기회였다.
혼자서는 결코 열 수 없었던 문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초대장이었다. 나는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어 답했다.
“네, 부족하지만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림1] 낯선 연구 제안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Image generated with Gemini)
□ 같은 말, 다른 세상: '학문의 언어'라는 벽
공동 연구는 시작부터 내가 겪었던 모든 연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언론학 석사와 교육학 박사였지만, 함께하는 공동연구자들은 보건학 박사, 사회복지학 박사 등
트라우마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지식의 성채는 높고 단단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기술적인 과정은 오히려 익숙했다. 진짜 어려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소통’의 문제였다. 우리는 분명 같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림2] 학문 분야 간 소통의 어려움(Image generated with Gemini)
첫 미팅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보건학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트라우마에 대한 정의와 내가 일상적으로 알던 트라우마는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보건학 박사님이 당연하게 사용하는 용어들은 내게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각 학문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문법,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생각보다 거대한 벽이었다.
분석 결과를 두고 토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론 보도의 프레임과 사회적 담론의 변화에 초점을 맞췄지만,
다른 박사님들은 그 현상이 국민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적 개입의 필요성을 먼저 짚어냈다.
미팅이 끝나고 나면, 머릿속이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방금 그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이었지?’, ‘내가 이해한 게 맞나?’ 혼자 끙끙 앓다가 용기를 내어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
하나하나 다시 물어봐야 했다.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 끊임없는 소통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림3] 협업을 통한 문제 해결과 깨달음(Image generated with Gemini)
□ '트라우마' 던전을 클리어하다
약 2개월간의 치열한 연구와 토론 끝에, 드디어 연구보고서의 「제5장 트라우마 이슈 분석」 챕터가 완성되었다.
살처분 트라우마부터 세월호 참사, 포항 지진,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겪어온 아픔의 역사가 데이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저 흩어진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 사회와 개인들이 어떻게 아파하고, 또 어떻게 회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였다.
결과를 정리해놓고 보니, 나 스스로가 매우 뿌듯했다.
2021년 12월, 마침내 연구보고서 「한국인의 트라우마와 회복력 증진 전략」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우리는 보고서 방법론의 한 축이었던 나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 파트를 학술논문으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다시 2개월간의 공동 작업을 거쳐 2022년 3월, 「토픽 모델링 기반 한국사회 트라우마 이슈 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KCI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제1저자 이름에는 자랑스럽게 내 이름이 올라갔다. 혼자서 코로나19 이슈를 다루던 내가,
불과 1년 만에 국책연구기관과 함께 한국 사회의 깊은 상처를 진단하고 학계에 기여하게 되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림4] 한국사회 트라우마 관련 연구보고서(좌)와 논문(우)
□ 레벨 업! 새로운 퀘스트, '미래 질병'
성공적인 협업 경험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졌다.
2023년 1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또 다른 박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트라우마 연구를 함께했던 동료 박사님의 추천이었다.
이번 연구의 주제는 「한국의 미래 질병 위험에 대한 인식과 대비」
지난 연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가올 미래의 질병 위협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나는 또다시 뉴스 빅데이터를 통해 ‘미래 질병 위험 이슈’를 분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는 ‘미래 질병’이라는 주제에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번 겪어본 협업의 경험은 내게 ‘경험치’라는 귀한 자산을 남겨주었다.
다른 학문의 언어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치열하게 소통하고 토론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법을 나는 이미 배웠다.
첫 공동 연구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연구는 진행되었다. 2010년부터 2023년 2월까지의 방대한 뉴스 데이터를 분석하며,
우리는 ‘예방적 건강관리’, ‘정신건강’, ‘취약계층 복지’, ‘기후변화’, ‘글로벌 협력’이라는 5가지 핵심 이슈가
우리 사회의 미래질병 위협 이슈를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결과물은 2023년 12월 연구보고서로 발간되었고,
2024년 5월에는 「언론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의 미래 질병 위험 이슈 분석」이라는 제목의 KCI 학술논문으로 다시 한번 세상에 나왔다.
[그림5] 한국의 미래질병 위협 관련 연구보고서(좌)와 논문(우)
□ 더불어 함께 레벨업!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의 시간은 내게 마치 한 편의 성장 RPG 게임 같았다.
2020년, 코로나19 논문을 혼자 쓰던 나는 이제 갓 여행을 시작한 레벨 1의 초보 모험가였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고, 때로는 외롭고 막막했다.
그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사님들이라는 든든한 동료들을 만나, 서로 다른 직업(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파티를 맺었다.
우리는 ‘트라우마’와 ‘미래 질병’이라는 새로운 던전에서 미션을 완수했고, 그 과정에서 티키타카 논의도 하고 서로의 등을 맡기며 마음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혼자서는 결코 깰 수 없었던 퀘스트들을 완수하며 레벨 2의 모험가로 성장했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의 교환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의 데이터가 그분들의 지식과 만나 비로소 '지혜'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나 혼자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으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밟고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나 혼자만 레벨 업’이 아니라, 파티원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더불어 함께 레벨업’의 기쁨을 그때 처음으로 맛보았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분야로 영역을 넓혀가며,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새로운 모험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다음에는 또 어떤 곳에서, 어떤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도전에 맞서게 될까?
[그림 6] '더불어 함께 레벨업'의 기쁨과 다음 여정에 대한 기대(Image generated with Gemini)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
작성자 | 제목 | 등록일시 | 삭제 |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